개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은 대승불교의 논서이다. 줄여서 《기신론(起信論)》이라고도 한다. "대승기신론"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대승(큰 수레) 또는 대승불교에 대한 믿음을 일으키는 또는 일으키기 위한 논서"이다. 대승기신론은 전통적으로 인도의 마명 보살(馬鳴菩薩, 아슈바고샤, Aśvaghoṣa: c. 100-160)이 기원후 2세기에 저술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1] 그러나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저자와 성립 시기에 대해 전통적인 견해와는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대승기신론은 산스크리트어 원본이나 티베트어 역본 없이 중국 양(梁)나라 진제(眞諦, Paramārtha: 499-569)와 당(唐)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 Śikṣānanda: 652-710)의 2종의 한역본만 존재한다. 대승기신론이 인도에서 성립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대승기신론은 크게 서분(序分) · 정종분(正宗分) · 유통분(流通分)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중에서 논의 본문인 정종분은 다시 인연분(因緣分) · 입의분(立義分) · 해석분(解釋分) · 수행신심분(修行信心分) · 권수이익분(勸修利益分)의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일심(一心 · One Mind) · 이문(二門 · Two Aspects) · 삼대(三大 · Three Greatnesses) · 사신(四信 · Four Faiths) · 오행(五行 · Five Practices)으로 요약된다.[2] 대승기신론은 이론과 실천 양면에 있어서 여러 교리사상을 받아들여 작은 책 속에 대승불교의 진수를 요약해 놓은 것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중국 · 한국 ·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 불교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마타는 어떻게 닦는가?(止行) 제1목 사마타를 닦는 방법을 설명한다(明修止方法) 若修止者,住於靜處端坐正意,不依氣息、不依形色、不依於空、不依地水火風,乃至不依見聞覺知。一切諸想隨念皆除,亦遣除想,以一切法本來無相,念念不生、念念不滅,亦不得隨心外念境界,後以心除心。心若馳散,即當攝來住於正念。是正念者,當知唯心,無外境界。即復此心亦無自相,念念不可得,若從坐起去來進止有所施作,於一切時常念方便隨順觀察,久習淳熟其心得住。以心住故漸漸猛利,隨順得入真如三昧,深伏煩惱信心增長,速成不退。唯除疑惑、不信、誹謗、重罪、業障、我慢、懈怠,如是等人 所不能入。 원문 직역: 만약 지(止)를 닦는다면, 고요한 곳에 머물며 단정히 앉아 뜻을 바르게 해야 하고, 호흡에 의지하지 않고, 형색에 의지하지 않으며, 공에 의지하지 않고, 지수화풍에 의지하지 않아야 하며, 내지 견문각지에도 의지하지 않아야한다. 일체의 모든 망상을 찰나 찰나마다 모두 없애고, 또한 없앤다는 생각조차 없애야한다. 일체의 법이 본래 상이 없음을 깨달으면, 모든 상이 찰나 찰나마다 생겨나지 않고 멸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늘 마음 밖에 경계를 만든 다음에 마음에 의해서 마음을 제거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방법을 쓰지 않는다. 마음이 만약 산란함을 좇으면 곧 마땅히 곧 가다듬어 정념에 주하게 해야 한다. 이 정념이란 마땅히 알라. 오직 마음뿐이고 바깥 경계가 없는 것이니, 곧 다시 이 마음도 또한 자상이 없어 찰나 찰나에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자리로부터 일어나 오고 가고 나아가고 머무는데 행동을 하는 바가 있으면 모든 때에 항상 방편을 생각하고 수순하고 관찰하여 오랫동안 닦아서 익숙하게 되면 그 마음이 머물게 된다. 마음이 머묾으로써 점점 매우 맹렬하고 예리해져 수순하여 진여삼매에 들어갈 수 있어 번뇌를 깊이 조복받고 신심이 증장하여 신속하게 불퇴전을 이룬다. 다만 의혹과 불신과 비방과 중죄업장과 아만과 해태한 자는 제외되니, 이와 같은 사람들은 능히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저자 강설: 첫째, 사마타를 닦는 방법 <사마타를 닦는 자세> 1. 고요한 곳에 살면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마음을 집중하여 정념(正念)에 들게 한다.(계를 지키고, 소욕지족(所欲知足)의 생활을 한다.) 2. 불전(佛前)에 지심으로 참회하여 업장을 벗어난다. 3. 그 밖에 의식을 구족하고, 훌륭한 선지식을 모시며, 세간의 잡스러운 일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 <사마타의 관법은 유심관임> 수식관, 부정관, 해골관, 변처, 공관, 지수화풍 사대 관찰, 견문각지(모든 것은 식이다)에 의한 모든 관법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유: 이들의 관법은 외계에 현상이 실재하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것을 관해서 마음의 통일을 닦는 방법이다. 본론은 유심관을 채택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상관(事相觀)을 취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유심소작(唯心所作)이며, 마음의 본성은 무념이기 때문에, 이 ‘법성무상(法性無相)의 이취(理趣)’에 도달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본디 무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고, 모든 것은 찰나 찰나에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소멸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므로, 드디어 ’망상을 제거한다고 하는 생각조차 버린다‘는 것이 저절로 실현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 밖에 경계를 만든 다음에, 마음에 의해서 마음을 제거한다고 하는 것과 같은 방법이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또 마음이 바깥 대상을 집착하여 산란해지면, 그 산란한 마음을 다스려 정념에 들게 한다. 이 정념이란, 다만 마음일 뿐이며 외경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좌선을 마치고 난 후의 마음가짐> 사람들과 교류하거나, 식사를 하거나, 수면을 취하는 등 행, 주, 좌, 와 어느 때든지 항상 마음을 집중하여 방편을 잃지 않게 하여 법성은 부동하다는 도리를 관찰해야만 한다. <지止를 완성하여 정定을 얻었을 경우> 사마타의 힘이 맹렬하고 예리해져 진여삼매에 수순할 수 있게 되어 더욱 진보해서 진여삼매에 들어가버린다. 이것이 사마타의 완성이다. 그러나 10신의 계위로 내범의 지위인 범부이기 때문에 번뇌를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번뇌를 완전히 굴복시키고, 믿는 마음이 증장하는 것을 얻어 십신의 계위를 완성하고 초주의 계위에 들어가 퇴보하는 일이 없는 불퇴전의 단계를 재빨리 이룩해야 한다. 이것은 부정취의 계위를 벗어나서 정정취의 계위에 들어가는 것이다. <사마타를 완성할 수 없는 사람> 1. 진여를 의혹하는 사람, 2. 믿음이 없는 사람, 3. 정법을 비방하는 사람 4. 중죄업장(살모, 살부, 살아라한, 파화합승, 출불신혈의 5역죄와 음계, 도계, 살인계, 대망어계의 4빠라지까), 아만이 강한 사람, 게으른 사람. 제2목 사마타를 닦아 수승한 능력을 얻는다 p534~ 復次,依如是三昧故,則知法界一相。謂一切諸佛法身與眾生身平等無二,即名一行三昧。當知真如是三昧根本,若人修行,漸漸能生無量三昧。 원문 직역: 또다시 이 삼매에 의지하므로 곧 법계 일상임을 알게 되니, 일체 제불의 법신과 중생신은 평등하여 둘이 없음을 말하며, 곧 일행삼매라 이름한다. 마땅히 알라. 진여는 이 삼매의 근본이니 만약 사람이 수행하면 점차 무량삼매를 낼 것이다. 저자 강설: 둘째, 사마타를 닦아 수승한 능력을 얻는다 진여삼매에 의하여 법계는 일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므로 제불의 법신과 중생신은 평등무이(平等無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진여는 범(凡), 성(聖)에 있어 전혀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더욱 이 진여삼매는 모든 삼매의 근본이므로 만일 진여삼매를 수행하면 진여에 수순함을 얻어 차례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싸마디를 얻게 된다. 이와같이 진여삼매의 사마타에는 수승한 힘이 포함되어 있다. 제3목 사마타를 닦을 때 악마에 홀리지 말라 或有眾生無善根力,則為諸魔外道鬼神之所惑亂,若於坐中現形恐怖,或現端正男女等相,當念唯心,境界則滅,終不為惱。或現天像、菩薩像,亦作如來像相好具足,若說陀羅尼,若說布施、持戒、忍辱、精進、禪定、智慧,或說平等、空、無相、無願、無怨無親、無因無果、畢竟空寂是真涅槃。或令人知宿命過去之事,亦知未來之事,得他心智辯才無礙,能令眾生貪著世間名利之事。又令使人數瞋數喜,性無常准。或多慈愛多睡多病,其心懈怠。或卒起精進後便休廢,生於不信多疑多慮。或捨本勝行更修雜業。若著世事種種牽纏,亦能使人得諸三昧少分相似,皆是外道所得,非真三昧。或復令人若一日若二日若三日,乃至七日住於定中,得自然香美飲食,身心適悅不飢不渴,使人愛著。或亦令人食無分齊,乍多乍少顏色變異。以是義故,行者常應智慧觀察,勿令此心墮於邪網。當勤正念不取不著,則能遠離是諸業障。 應知外道所有三昧,皆不離見愛我慢之心,貪著世間名利恭敬故。真如三昧者,不住見相、不住得相,乃至出定亦無懈慢,所有煩惱漸漸微薄。若諸凡夫不習此三昧法,得入如來種性,無有是處。以修世間諸禪三昧多起味著,依於我見繫屬三界,與外道共。若離善知識所護,則起外道見故。 원문 직역: 혹 어떤 중생이 선근력이 없으면 곧 여러 마구니와 외도와 귀신들 때문에 혼란을 당할 것이다. 만약 앉아 있는 동안에 형태를 나타내어 공포스럽게 하거나 혹은 단정한 남녀들의 모습을 나타낼 경우, 마땅히 오직 마음뿐임을 생각하면 경계가 곧 멸하여 마침내 괴롭히지 못할 것이다. 혹은 천상(天像)과 보살상을 나타내거나 또한 여래상을 지어 상호가 구족하며 때로는 다라니를 설하고 때로는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를 설하며, 혹은 평등, 공, 무상, 무원(無願), 무원(無怨), 무친, 무인, 무과하여 필경에는 공적하니 이것이 참된 열반이라 설하기도 한다. 혹은 사람으로 하여금 숙명통으로 과거의 일을 알게 하고 역시 미래의 일을 알게 하며, 타심지를 얻어 변재가 무애하게 하기도 한다.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세간의 명예와 이익되는 일에 탐착하게 하고, 또 사람으로 하여금 자주 성내고, 자주 기뻐하게 하여 성품에 일정한 기준이 없게 하고, 혹은 자애가 많거나 잠이 많고 병을 많게 하여 그 마음을 게으르게 하며, 혹은 갑자기 정진을 일으켰다가 뒤이어 곧 그만 두게 하며 믿지 않는 마음을 내어 의심하고 염려가 많게 하며, 혹은 본래의 수승한 행을 버리고 다시 잡업을 닦게도 한다. 때로는 세상사에 집착하여 여러 가지로 얽매이게 하며, 또한 능히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삼매를 얻게 하여 약간 비슷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모두 외도가 얻는 바로써 참된 삼매가 아니다. 혹은 다시 사람으로 하여금 하루, 이틀, 사흘 내지 이레 동안 선정 중에 머물게 하여 자연히 향기롭고 맛있는 음식을 얻어 몸과 마음이 적당히 기쁘고 배가 고프지도 않고 목이 마르지도 않게 하여 사람들이 그것을 애착하게끔 한다. 혹은 역시 사람으로 하여금, 먹는 것에 한계가 없게 하여 갑자기 많거나 적게 먹게 하여 안색이 변하도록 하니, 이러한 뜻이기 때문에 수행자는 항상 응당히 지혜로 관찰하여 이 마음으로 하여 삿된 그물로 떨어지지 않게 한다. 마땅히 부지런히 정념하여 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면, 능히 이러한 업장을 멀리 여읠 것이다. 마땅히 알라. 외도들이 소유하는 삼매는 모두 견혹과 수혹과 아만의 마음을 여의지 않은 것이니 세간의 명리와 공경에 탐착하기 때문이다. 진여삼매란 견상에 주하지 않고 득상에 주하지 않으며 내지 선정에서 나와도 역시 게으름과 아만이 없어 소유한 번뇌가 점점 엷어진다. 만약 모든 범부가 이 삼매법을 닦지 않는다면 여래의 종성에 들어갈 수 있는 도리는 없다. 세간의 모든 선삼매를 닦으면 대부분 탐닉을 일으키고 아견에 의지하여 삼계에 얽매여 외도와 함께 하게 되니, 만약 선지식이 보호하는 바를 여의면 곧 외도의 견해를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 강설: p541~ 셋째 이교도의 가짜 선정과 진여삼매를 비교하여 가짜 선정이 진짜 선정과 어떻게 다른가를 논술한다. 이교도의 모든 싸마디는 무아의 입장을 취하지 않기 때문에 아집이 있다. 그러므로 선정으로서는 수승한 경우라도 그 근저에 견번뇌와 탐애, 아만이 반드시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인 명예와 이익을 얻고 존경을 받으려고 욕심을 부려 집착한다. 그러나 불교의 ‘진여삼매’는 무아, 공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자기 견해에 집착하는 견상(見相)에 머무르는 일도 없고, 유심의 도리를 깨달아 외경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외경에 집착하는 득상(得相)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또 진여삼매의 선정을 나와서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아만심을 일으키는 일도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의 번뇌가 점차로 미약하고 희미해져 간다. 이것이 올바른 사마타를 닦는 자세이다. 제4목 사마타를 닦아 얻는 이익을 설명한다 復次,精勤專心修學此三昧者,現世當得十種利益。云何為十?一者、常為十方諸佛菩薩之所護念。二者、不為諸魔惡鬼所能恐怖。三者、不為九十五種外道鬼神之所惑亂。四者、遠離誹謗甚深之法重罪,業障漸漸微薄。五者、滅一切疑諸惡覺觀。六者、於如來境界信得增長。七者、遠離憂悔,於生死中勇猛不怯。八者、其心柔和,捨於憍慢,不為他人所惱。九者、雖未得定,於一切時一切境界處,則能減損煩惱、不樂世間。十者、若得三昧,不為外緣一切音聲之所驚動。 저자 강설: 진여 삼매를 수행하는 사람은 현세에서 열 가지 이익을 얻는다. 첫째, 언제 어디서나 거룩한 붓다와 보디쌋뜨와가 수행자를 마음에 두고 보호하여 주신다. 둘째, 진여삼매를 닦는 사람은 모든 악마와 나쁜 귀신들로 말미암아 공포에 떠는 일이 없다. 셋째, 아흔다섯 가지의 이교도와 귀신들로 인해서 혼란을 일으키는 일이 없다. 넷째, 대승의 심오한 정법을 비방하는 일에 떨어지지 않으며, 나쁜 일을 저질러서 굴레를 쓰는 일도 없게 된다. 다섯째, 모든 의혹과 사악한 생각을 소멸할 수 있다. 여섯째, 거룩한 붓다의 깨달음의 경지에 대하여 믿음을 증장시킬 수 있다. 일곱째, 윤회의 세계에 태어난 자신의 박복함에 실망하거나 비탄에 잠긴 마음을 반전시켜, 생사의 고뇌 속에서 허덕이면서도 용맹심을 가지며, 곤란에 부딪쳐도 선의지가 꺾이지 않는다. 여덟째, 마음이 유화하게 되며, 교만한 마음을 버릴 수가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나쁜 일을 꾸미지 않으므로 괴로워할 일이 없다. 아홉째, 아직 진여삼매를 확실히 얻지 못한 경우라도 언제 어디서나 번뇌를 잘 경감시킬 수가 있어서, 세속적 쾌락을 구하는 일이 없다. 열째, 진여삼매를 확실히 얻으면 믿음이 확립되어 물러서는 일이 없으므로 밖으로부터 오는 모든 말이나 사상의 유혹에 놀라거나 충동되는 일이 없다. 위빠싸나는 어떻게 닦는가? 復次,若人唯修於止,則心沈沒或起懈怠,不樂眾善、遠離大悲,是故修觀。修習觀者,當觀一切世間有為之法,無得久停須臾變壞,一切心行念念生滅,以是故苦。應觀過去所念諸法恍惚如夢,應觀現在所念諸法猶如電光,應觀未來所念諸法猶如於雲忽爾而起,應觀世間一切有身悉皆不淨,種種穢污無一可樂。 如是當念:「一切眾生從無始世來,皆因無明所熏習故令心生滅,已受一切身心大苦。現在即有無量逼迫,未來所苦亦無分齊,難捨難離而不覺知。眾生如是,甚為可愍。」 作此思惟,即應勇猛立大誓願:「願令我心離分別故,遍於十方修行一切諸善功德,盡其未來,以無量方便救拔一切苦惱眾生,令得涅槃第一義樂。」 以起如是願故,於一切時、一切處,所有眾善,隨已堪能不捨修學,心無懈怠,唯除坐時專念於止。若餘一切,悉當觀察應作不應作。 저자 강설: 만약 사람이 오직 사마타(止)만을 수행하고 있으면, 마음이 혼침하거나 게으름을 일으켜 온갖 선행을 원하지 않아 대비심을 멀리 여의게 되므로 위빠싸나(觀)도 닦아야 한다. 위빠싸나를 닦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모든 현상을 관조해야 한다. 첫째, 존재의 실상에 관한 위빠싸나이다.(법상관) 세간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잠시 동안 머무를 뿐 반드시 변화하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무상을 관조한다. 둘째, 대비(大悲)에 관한 위빠싸나이다.(대비관) 모든 존재는 시작을 모르는 과거로부터 무명으로 말미암아 마음의 생성과 소멸이 일어나며 그에 따라 지금까지도 온갖 고뇌를 받고 있다. 이러한 존재의 실상을 관조하며 대비를 베푸는 것이다. 셋째, 대원(大願)에 관한 위빠싸나이다.(대원관) 원하옵건대 나의 마음으로 하여금 분별하는 버릇을 버리고,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람들을 제도하여 고해에서 건져내며 모든 착한 일과 공덕을 수행하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도 언제까지나 쉬지 않고 많은 방편으로 모든 사람들의 고뇌의 뿌리를 뽑아 그들로 하여금 니르와나의 즐거움을 얻게 한다고 관조한다. 넷째, 정진에 관한 위빠싸나이다.(정진관) 언제 어디서나 실천하여, 선행이라고 하는 선행은 자기의 힘이 있는 한 모두 실천하여 포기하지 않으며 잠시라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는다고 관조한다. 다만 앉아서 사마타에 전념하고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 어디서나 위빠싸나를 수행하여 마땅히 해야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관조해야 한다.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함께 모두 닦아야 한다. 若行若住、若臥若起,皆應止觀俱行。所謂雖念諸法自性不生,而復即念因緣和合善惡之業,苦樂等報不失不壞。雖念因緣善惡業報,而亦即念性不可得。若修止者,對治凡夫住著世間,能捨二乘怯弱之見。若修觀者,對治二乘不起大悲狹劣心過,遠離凡夫不修善根。以此義故,是止觀二門,共相助成,不相捨離。若止觀不具,則無能入菩提之道。 저자 강설: 행, 주, 좌, 와, 기에서도 모두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함께 수행한다. 사마타를 닦아서 모든 것의 자성은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고 사유한다고 하더라도(심진여문의 평등문의 입장, 非有) 동시에 위빠싸나를 닦아서 인연화합에 의하여 생겨나는 선악의 까르마와 고락의 과보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심생멸문의 입장, 非無) 사유한다. → 사마타에 즉하는 위빠싸나, 비유즉비무(非有則非無)를 관하는 것, 지관쌍운(止觀雙運)을 실습함 거꾸로 위빠싸나를 닦아서 인연화합에 의하여 생겨나는 선악의 까르마를 사유한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사마타를 닦아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본성은 불가득이라고 사유한다. → 위빠싸나에 즉하여 사마타를 수행하는 것, 유(有)를 인정하면서도 그 배후의 깊숙한 곳의 공(空)을 보는 것이다. 또 사마타를 수행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명예와 이익에 욕심을 부려 집착하는 것을 대치함과 동시에 성문, 연각의 생사를 싫어하여 세간을 버리는 겁약한 견해를 버려야 한다. 또 위빠싸나를 수행하는 사람은 성문, 연각의 자비로운 마음을 내지 않는 편협하고 졸렬한 마음의 과실을 대치함과 동시에 세속적인 명예와 이익에 집착하며, 해탈에 매달려 선근을 수행하지 않는 과실을 피해야 한다. 이와같은 의미를 가지므로 사마타와 위빠싸나의 두 부문은 서로 도와서 이루어지며, 서로 떨어질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타와 위빠싸나를 함께 닦지 않으면 거룩한 붓다가 가르치신 깨달음의 길에 들어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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